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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박형규 목사

by 관리자 posted Jun 08, 2022 Views 11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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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99-07-08

박형규(기장 증경 총회장)

최영실(성공회대학교 교수/ 발행인)

 

날짜: 1999년 7월 8일

장소: 한국신학연구소 서울사무소

 

 

 

최영실 :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날씨도 무더운데 이렇게 먼 곳까지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형규 :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림 지 받아 보면서 늘 뭔가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때때로 원고 청탁을 받았어도 글쓰기가 힘들었는데, 이렇게 대담을 통해서 기여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최영실 : 독재정권 아래에서, 제일교회에서 길거리에서 예배를 드리던 것이 어제 같은데, 한동안 못 뵙다가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오늘은 8.15 해방 54주년을 맞아서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통일, 분단, 화해, 이런 문제를 목사님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박형규 : 8.15 해방은 저에게는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전화번호는 항상 끝이 1945입니다. 요새는 이사를 가서 그걸 못 쓰는데, 저의 카드나 은행계좌나 1945를 많이 씁니다. 해방된 그해를 잊지 말자는 것이죠. 그때 나이가 22살이던가 그랬는데 그때의 감격과 기대에 비해서는, 해방 후 발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남북분단이 극복되지 않고, 대치와 냉전 상태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슬픕니다. 이제 인생을 마감할 때가 가까왔는데 살아있는 동안에 남북통일이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됩니다.

 

최영실 :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21세기를 맞으면서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말씀 나누었으면 합니다. 우선 목사님의 경험을 통해서 8.15해방 당시의 상황, 해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런 점을 짚고 넘어가면 합니다.

 

박형규 : 지금의 젊은이들은 해방 전의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한국 민족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방 전사, 특히 일제 36년 동안의 삶을 공부해야 됩니다. 저는 일제 하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일제하에서 집안이 망하고, 일본에 가서 한 십 년 동안 일본의 빈민으로서 살았고, 해방 전에 돌아와서도 별로 크게 활동한 일도 없고 그저 해방이 되리라고 하는 기대 가운데서 지냈습니다. 학교 선생을 하면서, 영어 공부 특히 한글 공부를 하면서 경찰에 끌려가서 한국인 고등계 형사한테 고문을 받고 일본 헌병에게 고문을 당했어요. 피신해서 한동안 숨어 있다가 집에 돌아온 그 다음날 해방이 되었어요. 남자는 징병, 징용으로, 여자는 정신대로 끌려가는 삭막한 상황에서 해방의 소식을 들으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시골의 청년들이 너무 기뻐서, 조금은 광적이 되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고 그랬던 것이 기억납니다.

 

해방 전사를 얘기하면 한일합병, 김구 선생의 상해 독립 운동, 안중근의 이등박문 살해 사건, 그리고 3.1독립 운동이 있습니다. 그런 독립 운동의 얼이랄까 정신이 국민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실패로 돌아갔어요. 실패로 돌아갈 때마다 우리 민족에게는 상당한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국민 전체가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3.1운동이 지나간 다음에는 전 국민이 정신병을 앓는 것과 같은 상태였어요. 최남선 같은 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일본을 지지하는 쪽으로 넘어가고, 한편 교회도 신사참배를 강요받고 순응했죠. 마치 우리에겐 독립의 기회가 없으니, 일본의 속국으로 일본과 타협해서 일본 사람으로 잘 살아보자, 또는 지정학적으로 소망이 없다는 생각에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는 사람이 지식인과 종교인 사이에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것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해방되면 우리가 기대한 대로 자주독립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우리가 독립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고 상해 임시정부가 참여했기 때문에 해방 후에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빠지고, 신탁통치니 뭐니 하면서, 남은 미국의 지배 하에 북은 소련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최영실 : 해방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셨는데요, 그래도 그때의 국제적 정세나 역사적 상황을 더 알아야 분단의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말고 인간의 역사를 좀 얘기 해 주시죠.

 

박형규 : 미국과 소련이 우리를 반반씩 갈라놓는 국제적인 상황 속에 우리가 처해 있었는데, 이렇게 된 데는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체적인 힘이 국제 사회에 충분히 미치지 못하고 피동적으로 그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또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때로는 미국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는 세력과, 소련과 중국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는 세력, 그리고 그 가운데의 중도적 민족주의 노선(김구, 김규식), 이렇게 세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이 세력들이 6.25 당시에 역시 서로 타협하거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좌우합작, 나아가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북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와서 피격되게 되죠. 그런 일련의 역사적 현실이 알게 모르게 우리 민족을 규정해서,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것을 원죄처럼 안고 태어나는 것이죠.

 

최영실 : 그건 우리의 ‘원죄’라기보다는 강대국의 ‘죄성’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방을 주체적으로 이루지 못했기에 이런 문제를 안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분단 현실은 동족상잔의 전쟁, 도끼만행 사건, 최근의 서해안사건 등 일련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더욱 고착되어가고 있는데요, 이런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디에 그 원인이 있을까요?

 

박형규 : 해방 후에 이승만 박사가 이끄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세력과 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북의 김일성 세력이 양대 세력으로 급부상을 하고, 그 가운데 민족주의 세력이랄까, 임시정부 세력 있었는데, 무력을 앞세운 강대국 측의 세력에 의해서 민족주의자들이 소망한 것은 이룰 수 없었습니다. 구라파의 핀란드나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에서도 좌우가 팽팽히 맞섰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독립을 쟁취했기에 분단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외세의 원인도 있지만, 국내의 원인도 있습니다.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뿐 아니라, 김구 김규식 같은 지도자들이 폭력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살아남을 수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음을 인식해야 됩니다. 이런 남북분단의 상황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같은 분열의 골이 너무 깊어져서 평화적으로 분단을 극복할 수 없다고 전제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북이 먼저 공격하긴 했지만, 남에서도 북진통일을 주장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일반 국민들 사이에 좌우 분열의 상처가 굉장히 깊어져 갔습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6.25 때 희생된 사람, 그 전후해서 좌익이라고 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긍지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핍박도 당하고 소외되어 왔습니다. 최근에 장기수들이 석방되어 나왔습니다만, 국민의 정서 가운데 이북의 공산주의 세력을 같은 동족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원수로서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이 분단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것 같습니다.

 

최영실 : 분단 고착의 원인이,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화 되면서, 서로 전쟁을 하면서 더 굳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미소의 냉전, 이데올로기 논쟁과 대립은  이미 끝이 났는데도 우리만 이전과 같이 대결하고 있으니 이런 점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분단을 깨뜨리고 평화를 이룩하려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분단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박형규 : 그런 분단 상황 속에서도 어느 한 쪽에 동조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분단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남쪽에서는 지식인 가운데, 특히 젊은이들, 학생들 가운데 많았습니다. 그들은 분단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어요. 4.19 때만 해도 그것이 곧바로 통일운동으로 연결되었죠. 지금은 이산가족 문제를 많이 부각시킵니다만, 분단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불행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경제도 발전되고, 민주화도 이룩되고, 인권도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동안은 민주화와 통일이 병행되는 그런 논리에서, 70년대부터는 우선 민주화 해 놓고 통일을 이루자는 이른바 선민주 후통일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에 대해서 선통일 후민주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최영실 : 목사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박형규 : 나는 선민주 후통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현실에 안 맞는다고 생각해요. 남쪽에 사는 사람은 우선 민주화가 되어야 통일에 대한 말도 할 수 있어요. 군사정권 하에서는 통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범죄였어요. 기독교사회문제 연구원에서 강만길, 이영희,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들과 같이 교과서에서 통일문제가 어떻게 표현되고 또 교육되고 있는지 조사를 하다가 그것이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하마터면 모두 감옥에 갈 뻔한 적이 있어요. 통일에 관한 한 완전히 일반 국민이 관여할 수 없는 타부로 여겨졌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통일 문제를 가지고 국민을 위협, 선동하고, 반공감정을 이용하여 독재정권 정당화하는 데 많이 이용했습니다.

 

최영실 : 어떤 게 먼저냐는 논의는 무의미할 수도 있는데, 최근에 와서 통일 문제가 열려 있는 것 같으면서도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서해안 사건이라든지, 금강산 관광객 민 여인 억류사건을 보는 시각도 통일을 해야 한다는 시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밖으로는 통일 문제가 열려져 있고, 북도 가고 그러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박형규 : 마음이 열리지 않은 것이죠. 분단 체제가 체질화 된 것이죠. 체질화되면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어쩌면 분단을 즐기고 있는 셈이죠.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군사독재 시절에는 이북을 공격하는 공격적인 체질인데, 노태우 이후부터 차차로 공격적이 아닌 화해 협력을 말로는 부르짖습니다. 체질이 달라진 남북이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방법은 남과 북이 같이 지금까지 가져온 공격적 체질을,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체질로 바꾸는 것뿐입니다. 가령 민 여인 사건에서 보면, 민 여인 자신으로서는 의식을 못하겠지만, 밑바닥에 뭔가 우월감이 있어요. 남쪽 사람이 전부 다 이북은 굶어죽는다, 정치를 어떻게 했기에 나라가 저 모양이 되었나, 하고 굉장히 우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상태인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발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북 사람들이 민 여인을 잡고 감시원을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서해안 사건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대응해야 할 사건은 아니었어요. 저쪽에서 한 방 쏘았다고 이쪽에서 막 여러 방을 쏘아서 배를 세 척이나 침몰시키고 할 일은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배와 배가 부딪치는 상황이었는데 나중에는 포격까지 가하는 상태까지 간 것이죠.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측 언론에서 보도하는 자세와 국민이 가지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이겼다고 하는 것, 상대방에 대해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된다고 하는 우리의 감정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감정은 아니죠.

 

최영실 : 현재의 정부가 햇볕 정책도 내 걸고 통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님께서는 햇볕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우리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박형규 : 사실은 햇볕정책 통일정책이니 포용정책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비통일적이라고 봅니다. 통일을 하려면 평화통일이고, 평화통일을 하려면 서로가 일대일로 인정하는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죠. 우리는 자꾸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그것을 연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햇볕정책이니 포용정책이니 하는 것은, 김영삼 정부부터 나온 것인데, 한완상 장관이 햇볕정책을 하다가 쫓겨나지 않았어요, 그것을 현재 정부가 사용한 것이죠. 김영삼 정권은, 김일성 사망 직후가 사실은 화해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그것을 잘못 인식해서 남북관계가 굉장히 경직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햇볕 정책이라는 그 용어자체가 결국은 옷을 벗기는 것이거든요. 말로는 그게 아니고 3단계 평화통일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용어자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햇볕이니 포용이니 하는 용어 쓰지 말고 당당하게 이북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고 외교나 경제교류를 해나가면 좋겠어요. 통일정책만은 선전용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화를 해 나가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자꾸 옷을 벗기겠다고 하면 누구라도, 나라도, ‘우리가 옷 벗을 줄 아느냐’ 하게 되죠. 이것도 정권 자체의 우월의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최영실 : 햇볕정책이라는 말에서 오는 문제점에 대해서 목사님 말씀에 공감을 합니다. 성서 말씀이 생각나는데요, 하나님은 해와 비를 악한 자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똑같이 주신다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북의 체제, 북한이 우리를 볼 때 느끼는 남쪽의 문제점 등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동등한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이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데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형규 : 통일을 위한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통일 문제를 일반 국민이 얘기할 수 있게 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1989년인가 “통일에 대한 그리스도교 선언”이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 전에 도잔소 회의에서는 WCC가 많이 후원했죠. 저 개인적으로는 1975년인가 WCC에 갔을 때 WCC 국제위원회 총무가 이북에서 자꾸 WCC에 가입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하더군요. 우선 교회가 있어야 가입이 되지 않겠느냐, 우리가 못 가니까 우리가 WCC 통해서 이북에 사람들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후로 WCC가 꾸준히 이북에 사람을 보냈죠.

 

그러나 문제는 보수 진보할 것 없이 대부분의 교회들은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반공적이었어요. 한국 교회는 반공의  보루였어요. 나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화”라는 글을 썼다가 조사를 받고 감옥까지 간 경험이 있는데, 그때까지는 공산주의와의 대화는 터부였습니다.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민주화만 가지곤  안되겠다, 민주화를 하려면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고, 그 결실이 한국교회 통일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 내용은 우선 한국 교회 자체가 회개해야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교회 자체가 지금까지 해 온 잘못을 민족 앞에 회개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결과로 여러 가지 군사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접촉이 가능해졌고, 그리온 회의라든가, 문익환 목사의 불법적인 방북 등이 있었고, 어쨌든 그런 등등으로 해서 기독교가 통일에 앞장섰죠. 그러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때만 해도 그런 것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완전히 180도 달라졌어요. 보수적이고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북에 가서 굶주린 이북 사람들을 지원하고,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당시 NCC계통을 비판한 사람들이 오히려 앞장서는 상황이 되었어요.

 

최영실 : 그리스도인들이 80년대 말기에 통일운동하고 남북교회 만남을 주선한 것은 중요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아주 소수였고, 대부분의 교회가 통일 얘기만 해도 그것이 성서적이냐고 물어온 목사님이 있었거든요. 예수의 선포도 평화, 화해, 하나됨 이런 것이었는데 왜 우리 나라 기독교는 통일에 대해 이렇게 적대적이고 외면하고 그래왔을까요? 그리고 지금도, 몇몇 분들이 통일운동을 주도하기 위해서 돈을 갖다 준다든지 하는 차원 말고는,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통일이 전체 운동으로 가지 못하는 것 같거든요. 왜 이렇게 교회가 통일, 화해, 평화를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나 하는 문제를 짚어 주시면 합니다.

 

박형규 : 한국 기독교인이 통일문제에 소극적이 된 이유가 몇 가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김일성 정책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북에서 이남으로 쫓겨오는 일이 있었죠.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를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의 정책에 동조하는 것만을 인정했고, 그래서 기독교연맹이 생겼습니다. 또 하나는 무신론자는 무조건 적그리스도다고 교리적으로 가르쳤기에 공산주의자는 적이다는 단순한 교리적 행태가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봐요.

 

최영실 : 이북이 기독교를 박해하기 전에 기독교가 어떤 모습이었기에 박해를 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기독교가 참 성서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그런 기독교 정신으로 그 당시에 존재했느냐 하는 것이죠. 민족, 통일, 화해를 외면한 채로 미국 자본주의와 결탁한 기독교를 보고서 문제점을 느낀 것도 한 면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박형규 : 이북이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는 간단하죠. 이북의 정권이 소련을 따르는 정권이니까, 그들 입장에서 미국은 적이죠. 한국의 기독교가 대다수 미국의 선교사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고,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고, 종교적 종주국이라고 생각한 경향이 있죠.

 

최영실 : 기독교도 그런 갈등 구조 속에서 기독교 정신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채로 오늘날까지 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몇 년 전에 국제회의가 있어서 워싱턴에 갔을 때 회의에서 우리 쪽에서 누가 6.25 때 우리 쪽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니까, 북쪽에서 온 사람이 우리도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고 해서 이쪽 참가자가 깜짝 놀랐어요. 우리는 매일 그 전쟁을 통해서 우리만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북에서도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은 것을 생각하면서 통일을 이루지 않으면 21세기에서도 안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서해안 사태뿐 아니라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텐데, 왜 이렇게 한국 교회는 통일에 대해서 말로만 하고 진심으로 이루려고 하지 않는지 답답합니다. 이제 21세기를 전망하면서 국내 정세, 국제 정세 보면서 통일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지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

 

박형규 : 21세기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고 보는데, 모두들 기대를 많이 하니까, 우리의 삶의 태도도 거기에 맞춰서 바꿔져야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우선 21세기의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분명한 것은, 세계가 굉장히 좁아지고,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벽이 많이 허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 사이의 벽이 두텁게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봅니다. 21세기에는 어차피 남북간의 벽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냉전이 끝났는데도 한국에서는 지금도 냉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이런 남북 대치가 계속된다면 문제입니다. 분단을 극복하면 우리가 뭉쳐서 민족역량을 모아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소모적인 상황이 되고, 그 속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최대 과제는 분단극복과 평화 통일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부나 위정자의 태도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회가 남북통일을 선교의 과제로 삼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 같이, 우월 의식을 갖고 하는 데서 벗어나, 이북을 이해하고, 이북에 대해서 형제로 대하는 애정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이번 서해안 사건에서, 서해 해군이 그렇게 대결 상태로 들어간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책적으로는 굳건하게 경고해야 하고 미사일 문제도 경계하고 그러겠지만, 나는 이북의 군사력이 전쟁을 도발할 만큼 있다고 보지 않아요. 그러니만큼 우리는 우선 이북이 안심하고 자기들의 사회를 건설해나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일을 주변국가들과 더불어 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일반 국민들의 증오, 대결의 감정을 진정한 형제의 감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보는데, 이것을 앞장서서 해야 할 기관이 바로 교회라고 봅니다.

 

최영실 : 21세기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미소의 냉전체제가 끝났다고 하면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적 사고, 논리, 경쟁, 지배, 이런 것들이 더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21세기에서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해서 화해하고 평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21세기는 오늘보다도 더 위험한 세기가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서, 가장 거리낌이 되는 것을 해결하려면, 꼭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박형규 : 21세기가 장밋빛이 아니라 캄캄한 것이다. 환경문제, 자본의 횡포, 종교 문화간의 충돌이 무제한으로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인간의 오만에 의해서 지구가 파멸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분단상태가 이것을 극복하는 단서가 되리라고 봅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자본주의에 가장 덜 오염되고 거기에 대결하는 방식의 사회가 이북의 사회입니다. 지금 이북을 개방시키고 자본주의 체제 하에 흡수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에 대해서 이북은 굉장히 저항을 하고 있어요. 이런 저항을 하는 세력이 이북 외에도 중국, 베트남도 있습니다. 우리 남쪽도 세계 IMF를 극복하는 길이 반드시 IMF가 하라는 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 여기기서 제시되듯이, 우리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더 깊숙히 들어가 있다면, 이북은 아예 들어가 있지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남북이 협력하면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냉전상태에서 미국자본주의의 지배 상태로 세계가 가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세계 평화적인, 각 민족이 각각 자기들의 고유성과 자기들의 삶을 운영해 가는 어떤 삶의 모델을 창출해내는 데 있어서 남북의 통일 운동이 굉장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북이 하는 행태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이북이 왜 저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 동정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은 정부에서는 할 수 없고, 민간단체에서, 종교단체에서 특히 화해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날 때의 자세,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져 살면서, 형제간의 화해를 이루어내는 과정을 배울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최영실 : 목사님이 <해방의 길목>을 쓰신 때가 언제이죠?

 

박형규 : 책이 나온 것은 1974년이죠.

 

최영실 : 그때 그 책에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에, 예수의 사랑의 정신에 기독교인이 서야한다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었죠.

 

박형규 : 교회가 선 자리는 3.8선상이라고 썼다고 해서 판금이 되었죠.

 

최영실 : 성서적으로는 첫째는, 하나됨을 이루지 않고 갈등했을 때, 예언자 통해, 너희들 싸우다간 결국 이방 적국에 의해 멸망한다, 꼭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심판사상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둘째는, 바울의 로마서 9:1이하에서 자기를 박해하던 유대인 동족을 위해서는 나 자신은 그리스도에서 끊어져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하는, 기독론도 교리도 넘어서서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뿐이 아니라 저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일을 네가 적극적으로 먼저 해라, 그래서 내가 그들을 동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보다 저쪽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 북의 고통받는 형제들을 위해 예수님이 울고 계신다는 생각으로 새롭게 성서도 읽고 기도도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목사님, 끝으로 살림 독자에게 당부하실 말씀해 주시고 마무리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형규 : <살림>이라는 책의 이름 자체가 살린다는 뜻이죠. 백낙청 교수가 “통일에 대한 공부 길”이라는 말씀을 했어요. 통일은 하루아침에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이죠. 특정한 정치인들이 하는 게 아니라 국민 전체가 생각하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북의 동포를 생각하는 통일염원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을 때, 우리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의 애정을 새롭게 느낍니다. 저도 은퇴한 뒤, 연금을 받는 날부터, 연금의 십일조를 통일을 위해 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아직도 통일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이 너무 많아요. 살림이 독자들을 이런 마음으로 일깨우고 묶어주는 좋은 매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영실 :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독과 서독의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최근, 여성들 쪽에서 통일을 준비하면서 통일 기금, 통일 통장도 마련하고 북한동포 돕기 운동, 탈북자 위한 운동에 작은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 전체 교회가 메스컴이나 정부 차원 정책이 바뀌는 데 따라서 흔들리지 않도록 함께 기도하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도 계속 관심가져 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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